이락서당(伊洛書堂)
위치 : 대구 달서구 달구벌대로 967, (달서구 비지정문화재)
대구 달서구 파호동
조선조 정조때에 대구, 달성, 칠곡등 인근 9개 문중(門中)의 선현(先賢)들이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인 『강창』을 택하여 지은 것으로 도덕심의 함양과 교육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사용되어 왔다.(글:달서구청)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 1615)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22년(1798)에 건립한 강학소(講學所)이다.
정조가 등극하면서 탕평책을 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일어나자 당시 대구와 달성, 칠곡 등지의 명문가 유생 30명이 뜻을 모아 세운 후 인재 양성과 예학(禮學) 숭상을 위한 사숙(私塾)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락서당 건립에 참여한 문중은 모두 아홉 문중으로, 성주도씨·광주(光州)이씨·함안조씨·밀양박씨·전의이씨·일직손씨·순천박씨·달성서씨·광주(廣州)이씨이며, 이들을 통칭하여 9문 11향 30군자라 한다.
한강 정구는 창녕현감·지평·승지·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증이조판서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경학·산수·의약·풍수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대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낙재 서사원은 정구의 제자로, 주자학 및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때 대구 지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락서원은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일명 강창(江倉)이라는 곳에 있으며, 방 2칸·대청 2칸의 구조로 누각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이락서당(伊洛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경미재(京彌齊)와 모한당(慕寒堂)이라 쓰인 현판도 있었으나 2006년 도난당했다고 한다. 이락이라는 이름은 강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주자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한데, 유학의 중흥지 또는 성리학 그 자체를 의미한다. 현재 이락서당보존회가 구성되어 보존·관리한다.(글: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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