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기자의 노거수이야기 .65] 상주시 화동면 '낙화담 소나무'
불기운 다스리기 위해 연못 만들고 나무 심어 "두 임금 섬길 수 없다" 은둔 선비가 심어… '왜적에게 욕 당하느니 차라리' 임란땐 부녀자들이 꽃잎 떨어지듯 연못에 투신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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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 기념물 제113호인 김준신 의사 제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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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담(落花潭) 소나무(경북도기념물 제147호)'를 보기 위해 경북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를 찾았다. 소나무 주위는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순백이다. 모진 추위에도 초록의 제 빛깔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의 눈이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세상이 항상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저절로 솟아오른다.
소나무는 낙화담이라는 연못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섬에 자리잡고 있다. 생긴 모습부터 일반 소나무와는 다르다. 청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안동 북후면의 김삿갓소나무 등과 비슷한 삿갓모양이다. 가지에는 군데군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어 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지나 고개를 숙여 소나무 밑으로 들어가니 줄기는 서쪽으로 조금 휘면서 하늘로 뻗다가 10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를 사방으로 늘어뜨렸다. 가지는 땅에 닿았거나, 거의 닿을 정도이다. 눈이 내린 때문인지, 가지와 잎이 평소보다 더욱 붉고 푸르게 느껴졌다.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 추운 한겨울이 되어 다른 나무들의 잎이 모두 떨어진 연후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항상 푸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안내간판에 따르면 소나무의 수령은 550∼600년, 높이는 13m이고 직접 재본 가슴높이 나무둘레는 2.11m 이다. 가지에는 가지 처짐을 방지하기 위해 일자형 받침대 6개를 받쳐 놓았다.
과연 누가 이 연못에 소나무를 심었을까.
청도 김씨 대종중 김재궁 부회장(84)은 "우리 문중의 선조로 고려 말 황간 현감이었던 김구정 어르신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골짜기가 깊고 조용해 은거하기 적당한 현재의 판곡리로 거처를 옮겼다. 마을의 안산인 백화산이 화기(火氣)를 띠고 있어 김씨 성과 상극된다는 풍수설에 따라 화기를 중화하기 위해 마을 앞에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는데 섬에 있는 소나무가 그 때 심은 소나무"라는 이야기를 들려 줬다.
연못 조성 당시에는 규모가 5천여㎡에 달했으나 현재는 330여㎡정도로 줄었으며, 섬은 33㎡정도다.
낙화담 소나무라고 불린 이유도 궁금했다.
김구정의 후손인 준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으로 칠곡군 석전 등 경상도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상주 북천 전투에서 순직했다. 왜군은 자신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김준신에 대한 보복으로 판곡리에 쳐들어와서 김씨 일문과 동민들을 학살했다. 이 때 부녀자들은 왜적에게 욕을 당하기보다는 자결하는 게 옳다고 여겨 동네 연못에 앞다투어 낙화(落花)처럼 투신 자결해 후인들이 연못 이름을 낙화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내력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순 없지만 낙화담 옆에는 김준신 의사 제단비(金俊臣義士 祭壇碑, 경북도 기념물 제113호)가 있어 의사의 구국충절만은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낙화담 소나무는 위기를 맞았다. 잎이 시들면서 나무가 고사할 위기에 처했다. 김 부회장은 전문가를 모셔와 나무 옆에 있던 정미소에서 흘러나오는 중유가 원인이었음을 밝혀낸 후, 소나무의 뿌리를 자르고 석축을 쌓는 등 한 달여 동안 소나무 살리기에 나섰다. 김 부회장의 이런 노력으로 소나무는 2년 뒤부터 생기가 돌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지조를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도 마다한 올곧은 선비 정신과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연못으로 몸을 던진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슬픔을 간직한 낙화담 소나무는 그래서인지 더욱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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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weekly/life/article.shtml?id=20110107.01042075108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