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공원 인물동산 산책
일시 : 2012년 3월 25일 오후, 똑딱이 위치 : 풍경
(아랫글: 달서구 홈피)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시비(詩碑)
소재지 : 공원순환로8(두류공원 인물동산 내)
상세내용 :
백기만 선생은 1902년 5월 12일 대구 남산동에서 백량휴의 차남으로 태어나 1967년 작고한 시인으로 호는 목우(牧牛) 이며 필명은 백태(白態)이다. 그는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후 양주동, 유엽, 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동인으로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고, 1924년에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후 그는 민족시인 이상화와 교류하면서 학생들을 동원하 여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투옥되는 등 항일저항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 및 '씨뿌린 사람들'을 간행하는 등 대구와 경상 북도 지역 향토시인들의 시를 정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 세계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며, 시형은 산문적인 호흡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시비는 1991년 7월 15일 백낙운, 이설주, 이윤수, 전상렬, 여영택, 이민영, 전인규, 윤장근 등이 뜻을 모아, 대구가 배출한 항일운동가이며 대구사랑 실천자인 목우(牧牛) 백기만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두류공원내 인물동산에 건립하였다.
빙허(憑墟) 현진건 문학비
소재지 : 공원순환로8(두류공원 인물동산 내)
상세내용 :
현진건 선생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 나 1943년 5월 25일생을 마친 한국사실 문학의 대표적 작가 이다.호는 빙허(憑墟)이며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成城中學(성성중학) 4학 년을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가 호강대학에서 수학 후 1919년 귀국하였다. 1920년 '개벽'에 '犧牲花 (희생화)'를 발표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듬해에는 '빈처(貧妻)'를 발표함으로써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사용, 박종화 등과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에 입사했고,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로 옮겼으며 1935년 동일일보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친일문학 에 가담하지 않은 채 가난하게 살다가 1943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단편 20여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여러편의 수필 비평문 등을 남겼는데, 그의 작품 경향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사실주의 계열로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적 신변소설, 하층민과 민족적 현실에 눈을 돌린소설, 1930년대의 장편소설과 역사소설의 세 부류로 나눈다. 이밖에 그는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과 같은 비평문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조선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 기도 했다. 그는 김동인·염상섭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화 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위의 문학비는 향토 문학인들이 뜻을모아 영롱한 그 자취를 후세에 전하고자 1996년 11월 9일 두류공원내 인물동산에 비를 세웠다.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동상
소재지 : 공원순환로8(두류공원 인물동산 내)
상세내용 :
이상화 선생은 1901년 대구 중구 서문로에서 태어나 1943년 43세의 일기로 수감생활 휴유증이 겹쳐서 세상을 타개했다. 호는 無量(무량)·尙火(상화)·白啞(백아)이며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큰 아버지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 3년을 수료하고 1922년 파리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에서 2년간 프랑스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 진건, 백기만 등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활 동을 시작하였다. 21세때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 용, 박영희 등과 함께 '백호(白湖)'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학활 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때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 생봉기를 주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 였다. 1937년 3월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중국군의 장군인 형 이상 정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 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여 민족독립운동의 기운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 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시 정석'등의 저 작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못하고 43세에 세상을 떠났으 며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애족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문단데뷔는 '백조'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 '탄조'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 '이중의 사망', '나의 침실로' 등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의 발의 및 그가 재직했던 대륜고등학교 동문의 후원으로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그의 동상은 1995년 8월 15일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기 위하여 한국예총 대구시지회와 KBS 대구방송총국이 광복 5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두류공원내 인물동산에 제막했다.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소재지 : 공원순환로8(듀류공원 인물동산 내)
상세내용 :
대구사범 8·9회 학생들을 주축으로한 문예부·연구회·다혁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졸업한 후에도 유지하면서 계속 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의해 비밀결사 사실이 탄로됨에 따라 300여명의 대구사범 출신들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철저히 보도 통제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고, 결사 주동자 35명은 신원이 밝혀져 구속되었고 나머지는 혹독한 고문을 치르고 풀려났다. 구속된 35명은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었지만 사상범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과 조사를 당하고 2년 6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8.15해방과 더불어 출옥했으나, 이미 5명이 옥사했고 신병으로 출옥 후 12명이나 사망하였다.
이 비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대구사범 동지들과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동창생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98년 3월 1일 두류공원 인물동산내에 건립하였다. 기념탑은 태극화단과 3개의 주탑기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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