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 경주 대릉원 일원(舊 황남동고분군,舊 노동리고분군,舊 노서리고분군)
일시 : 2014년 3월 10일
경주 대릉원 일원(舊 황남동고분군)
위치 : 경북 경주시 첨성로 140 (황남동)
황남동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잘 알려져 있는 않은 곳으로 대릉원 옆, 황남초등학교 앞에 위치해 있다.
다섯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사철 멋진 자태를 보여 주는 곳으로 사진애호가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숨은 명소이다.
특이하게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연꽃 연못,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모두 사진의 소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대릉원
위치 : 경북 경주시 황남동 53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땅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같이 묻혀 있고 때로는 무덤 주인의 시종이나 노비들이 함께 묻히는 순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 되었고 이때 모두 1만5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 된 역사일수록 역사서 속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마련인데, 무덤들은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먹고, 잤는지 같은 생활상의 지식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노동리고분군)
위치 : 경북 경주시 동성로 96-6 (노동동)
경주를 가장 독특하게 만드는 풍경 중의 하나가 고분군이다.
대표적인 고분군이 대릉원인데, 이곳이 미용실에서 한껏 모양을 낸 도시 처녀 같은 느낌이라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는 노동리·노서리고분군은 수더분한 시골 처자 같다.
집채보다 더 큰 천년 전 고분이 21세기 생생한 삶과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편안하면서도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동동에는 금방울이 출토된 금령총, 화려한 금동제 신발이 출토된 식리총, 그리고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가 있다.
봉황대는 높이가 빌딩 7층 높이인 23m에 둘레가 250m나 된다. 봉황대는 고분이라기보다 동산에 가까운 느낌, 봉토 위에 고목 몇 그루가 자란다.
1970년대 정부에서 고분을 정비할 때, 고분들 사이의 집은 허물고, 고분 위에 자란 나무들은 캐내고 무너진 곳은 쌓은 뒤 잔디를 씌웠으나, 봉황대는 나무가 자란 채로 그대로 두었다.
마치 자연이 만든 분재같다.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봉황대의 이와 같은 인상적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온다.
경주 대릉원 일원(舊 노서리고분군)
위치 : 경북 경주시 금성로 262 (노서동)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마을은 노동동, 길 서쪽마을은 노서동이 되었다. 길 좌우에 작은 산만큼이나 큰 무덤들이 잇대어 있다.
노서동쪽에 있는 것이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쌍상총, 은령총, 천마총 등을 비롯한 14기의 고분이다. 노서리고분군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금관총이다.
봉분 없이 50cm 정도 높이의 평평한 잔디밭으로 덮인 쌍봉이 서봉총이다.
금관이 나와 주목을 받은 고분들이다. 특히 금관총은 1921년 신라 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되어 그렇게 이름 지어졌으며, 경주의 고분 발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주의 왕릉은 그 자체가 역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굴한 경위 또한 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
1926년에는 금관총에 바싹 붙어 있는 무덤을 발굴했는데, 이곳에서도 금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일제는 금관의 발굴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아돌프가 신혼여행으로 일본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금관을 굴출(掘出)해내도록 안내하였던 것이다.
‘서봉총’이라는 이름도 이와 같은 사연에서 연유한다. 스웨덴의 한문 표기인 ‘서전(瑞典, 스웨덴)에서 ‘서’자를 따고 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 장식이 붙어있다는 점에서 ‘봉’자를 따온 것.
서봉총 앞에는 이와 같은 인연을 담은 ‘서전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서봉총발굴기념비’가 있다.
호우총은 1946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이라는 점과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기에 더욱 기억하게 되는 고분이다.
그 고구려왕은 바로 광개토대왕. ‘광개토지호태왕 호우’라는 글씨가 새져진 그릇의 발굴로, 당시 신라가 고구려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유물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뚜껑 달린 청동합이다.(글: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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