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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산 대승사(四佛山 大乘寺) 천상의 네 부처가 내려 왔다는 사불암

한 글 2010. 3. 27. 11:14

 

 

사불산 대승사(四佛山 大乘寺)
천상의 네 부처가 내려 왔다는 사불암

 

 

봄이 오는 길목, 사불산 중턱에 자리한 문경 대승사는 지난겨울 폭설이 녹으면서 힘찬 물줄기가 계곡을 호령하고 있었다.

 


3월 둘째 주 찾아간 신라 고찰 대승사는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사불산 오르는 길은 지난겨울에 내린 폭설로 인해 구불구불한 길에 제설작업을 한 모레들이 많이 뿌려져 있었다.

 


그 길도 사불산 중턱까지 이어지고 있고, 좁고 가파른 산길에 좌우로 우거진 소나무 숲이 아주 장관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더 운치가 있을 듯싶은 그런 사찰로 가는 길 다운 길이였다.

 


대승사 일주문을 지나자 대승사 본전이 보였는데 화재로 인하여 다시 지어서 그런지 고찰로서의 품위를 느끼기에는 조금 부족하였으나 대웅전은 천년도 훌쩍 넘는 유구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대승사는 원효, 서산, 나옹 등 이름난 고승들이 거쳐 간 곳으로 현재 대웅전과 나한전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역사가 1,500년을 이어오다 보니 많은 전란과 화재를 겪으면서 현재까지 세 번에 걸친 삼창을 했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다 보니 창건에 얽힌 기이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대승사가 자리하고 있는 사불산은 본래 이름이 공덕산이었다. 진평왕 9년(587년)에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석불이 공덕산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 즉 '사불암(四佛巖)'이었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곳에 와 예경하고 절을 짓게 한 후 대승사라고 절 이름을 내렸다. 산 이름도 산마루에 사불암이 있다 하여 그 뒤로 사불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대승사 창건과 관련된 전설 가운데 우(牛)부도가 있다. 절을 지을 당시 어디선가 큰 황소가 나타나 나무와 기와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공사가 끝나자 황소는 숨을 거뒀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사람들이 소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지금 남아 있는 우부도다.

 


대승사 오르는 길 숲 속에 있는 이 무덤은 여느 스님의 무덤처럼 평범한 부도지만 큰 비가 내리면 빛을 발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또 나옹선사가 수행했다는 말안장 바위는 산꼭대기 절벽에 있는데 마치 회전목마처럼 생겼다. 바쁜 농사철에도 늘 상 이 바위에 앉아 노는 나옹선사가 미웠던 마을사람들은 선사가 입적한 뒤 홧김에 말의 머리 부분을 부숴 버렸다고 한다.

 

 

그 사건 후 이상하게 마을에 우환이 자꾸 겹치자 마을 사람들은 계곡 밑에서 버려진 말머리 부분을 주워 다시 바위에 붙였다. 지금도 그 바위에 가면 말머리 부분을 돌가루로 붙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기자가 확인은 하지 못했다.

 


대승사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575호로 지정된 대형 목각탱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를 나무에 부조, 투조 기법으로 고스란히 조각해낸 대형 작품이다.

 


원래는 부석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목각탱의 소유를 둘러싼 기록문서 4장(1876년 작성)도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도 조형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불상이다. 높이 87.5, 무릎폭 63㎝의 아미타여래좌상은 X-레이 조사 결과 불상 머리 부분에서 1301년에 쓴 묵서가 발견되고, 복장 유물에서는 1292년에 썼다는 보협인다라니 등이 발견됐다.

 

 

법당과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는 대승선원은 H자형의 독특한 건물모습도 눈길을 끌지만 이곳은 1944년 성철스님이 3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 정진하는 장좌불와를 계속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불암을 내려와 좁고 가파른 산길 우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려 우왕 때 창건한 참선 도량 윤필암이 있다. 윤필암은 암자라고 하기엔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1380년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가 되다가 1980년 초에 아예 모든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래서 흔히 보아오던 암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정리된 모습이다. 

 

 

윤필암은 수덕산 견성암, 오대산 지장암과 함께 3대 비구니 선방으로 유명하고,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꽃밭이 가꾸어져 있다.

 


윤필암에는 성곽처럼 높이 있는 특이한 법당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불전(四佛殿)이다. 흔히 법당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사불전은 불상 대신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을 보면 사불산 사불암(四佛巖)에 새겨진 부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다.

 

 

유리에 비친 사불암의 마애불이 바로 불상인으로 바위를 직접 가져다놓을 수 없음에 법당 안에서 사불암을 우러러보며 마음속에 부처를 그린다. 말하자면 사불암은 이 산 전체의 불상인 셈이다. 

 


윤필암은 일반 사람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극히 한정되어 있다. 이곳을 나와 바로 옆으로 더 가파른 묘적암이 있는 곳은 수백년이 넘은 전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쭉쭉 뻗어 있어 마치 원시림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묘적암(妙寂庵)은 사불산 상부에 위치한 소박한 민가 모양의 암자로 고려 말 나옹선사가 출가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철, 서암스님 등도 오랫동안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날 묘적암 입구에 일반인 출입금지 푯말이 있어 그냥 갈까하다가 올라가니 마침 한 보살님이 마당에 계시고 인사를 하니 스님께 여쭈어 문을 열어줄까 물어보고는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기자는 묘적암에 계시는 스님에게 건네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이건우 신도 회장 ‘물레방아’ 뉴스북을 보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오면서 옆 건물에 있는 현판 글씨 일묵여뢰(침묵은 우뢰와 같다)가 눈에 들어왔다.


묘적암에는 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 살았던 나옹이 암자를 비운 사이 누군가 와서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나옹을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마당의 풀을 모두 뽑고 베었다고 한다.

 


나중에 돌아온 나옹이 “어찌 내 벗들을 다 쫓아버렸느냐”며, 마당의 풀을 다 없애면 내 벗인 여치와 매미와 메뚜기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며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대승사에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대승(大乘 : 큰수레)'에 함께 타고 부처로 화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대승사는 문경지역 최초의 사찰일 뿐만 아니라, 경북북부지역에서도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로써 불교문화의 태동지이며, 지금까지도 그 법맥을 유지하고 있는 고찰로 유명하다.

 


이곳을 나와 김천으로 오는 길에 있는 산북면 석봉리 용선사(龍禪寺)도 찾았다. 용선사가 있는 마을에는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마을 24가구 127명의 주민이 사이좋게 오손 도손 살고 있었는데 1949년 12월 24일에 중무장한 군인 70여명이 마을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공비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어린아이, 여자, 노인 구분 없이 모두 논바닥에 세워놓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때 마을주민 86명이 사망하였는데 12세미만의 어린아이만 26명이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학교에 갔다가 오던 학생들과 뒷마을에 부역을 갔던 사람들 그리고 장에 갔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원혼을 달래주고자 법일(法一)스님이 그 학살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용선사(龍禪寺)라는 절을 세웠고 용선사 옆에는 문경시가 세운 영혼비가 있다.

 

▲ 용선사 가늘 마을 입구에 있는 금줄이 이채롭다.


<대승사 가는 길>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IC에서 나와 점촌을 지나 34번 국도를 따라 산북면으로 가면 김용사 가는 길이 있는 김용 삼거리를 조금 지나면 대승사 팻말이 보인다.

 

 

출처 : http://www.gcinews.com/ArticleView.asp?intNum=13066&ASection=00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