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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궁면 전설(설화)

한 글 2010. 4. 1. 09:06

 

경북 예천군 용궁면 전설(설화)

 

   용 궁 면 (龍宮面)

  • 용궁현(龍宮縣)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신라시대에는 축산(竺山) 또는 원산(圓山)으로 불렀으며, 고려 때에는 자사(刺史)를 둔 용주(龍州), 1005년(목종 8) 용주군(龍州郡)이 되었다가 1012년(현종 3) 다시 용궁군으로 고을을 고쳐 상주목에 속하고,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다. 1413년(태종 13) 용궁현이 되어 현청(縣廳)이 향석리(鄕石里)에 있었는데 1856년(철종 7)에 큰 장마로 인하여 내성천(乃城川)과 낙동강이 넘쳐서 현청이 떠내려갔으므로, 그 다음 해에 현감(縣監) 이윤수(李胤秀)가 읍터를 포금산(抱琴山) 아래로 옮기고 신읍면(新邑面)이라 하여 동부(東部), 서부, 북부, 남부, 금원(琴原), 훤평(喧坪), 가야(佳野), 장승(長升), 화미(化味), 후평(後坪), 산암(山岩), 덕동(德洞), 녹동(鹿洞), 보계(洑溪), 송천(松川), 인암(印岩), 경암(景岩), 나산(羅山), 장평(長坪), 월오(月梧)의 20개 동리를 관할하였고, 1895년(고종 32) 용궁군이 되어 신읍면(新邑面), 구읍면(舊邑面), 북상면(北上面), 북하면(北下面), 서면(西面), 남상면(南上面), 남하면(南下面), 내상면(內上面), 내하면(內下面), 신상면(申上面), 신하면(申下面) 11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예천군에 통합되고 용궁면이 되어 구읍면(舊邑面)의 무동, 지동, 대은, 동림, 교촌, 석정, 산택, 등암, 산평, 원당, 향사, 성저, 무촌, 루문, 진포의 15개 동리와 서면의 왕태동, 북상면의 풍정, 봉산, 성도, 신하의 4개 동리와 문경군 산동면의 연평, 연화, 연소, 양모, 송본의 5개 동리와 예천군 화장면의 지내리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용궁면(龍宮面)으로 고쳐서 읍부, 금남, 가야, 덕계, 송암, 월오, 무지, 대은, 산택, 향석, 무이의 11개 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개포면, 남쪽은 지보,풍양면과 문경시(聞慶市) 영순면, 서쪽은 문경시의 영순,산양면, 북쪽은 문경시 산양,산북면이 있다.

    용궁면(龍宮面)의 지명 유래는 용담소(龍膽沼)와 용두소(龍頭沼)의 두 소룡(沼龍)이 이루어 놓은 수중(水中) 용궁(龍宮)과 같이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지었다 한다.

    관광명소로는 회룡포, 용궁향교, 황목근이 있으며, 특산물은 용궁진상미, 수박, 표고버섯, 풋호박, 거봉포도 등이 있다.
  • 왕의산 (王衣山)
    • ㅇ 위 치 : 용궁면 덕계리 덕봉 뒷산

      ㅇ 내 용

      덕봉(德峯)마을 뒤 서북쪽에 있는 높이 340m의 산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복주(福州 - 현 안동시)로 남천(南遷)할 때 이 산에 이르러 소나무에 옷을 걸어 놓고 쉬어 갔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

      덕봉(德峯)은 덕계리의 으뜸마을로 성주 도씨(星州都氏)의 집성촌이다. 마을 앞 남쪽 도명천,명찬(都命天,命燦) 형제(兄弟)의 효행을 기리는 쌍효각(雙孝閣)이 있으며, 이들 형제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시묘살이 할 때, 호랑이가 밤마다 지켜 주었고 까마귀(慈烏) 한 쌍(雙)도 무덤 옆 나무에 깃을 틀고 6년 간 함께 애통했다고 하며, 사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모두 증직받고 정려(旌閭)되었다.
  • 옥미봉 (玉美峯)
    • ㅇ 위 치 : 용궁면 송암1리

      ㅇ 내 용

      송암1里(龍岩) 마을 뒷산에 위치한 산 봉우리를 옥미봉(玉美峯)이라 하는데, 경치가 수려하고 주변경관이 매우 빼어나다.

      이 마을 뒷산에는 약물이 나오는 작은 샘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선녀(仙女)들이 수시로 내려와서 약수물도 마시고 목욕(沐浴)을 즐기곤 하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선녀 하나가 그만 실수하여 물에 빠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선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자리에 높은 봉우리를 만들어 주고 옥미봉(玉美峯)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마을에서는 이 봉우리에 묘(墓)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지금도 묘를 쓰는 것을 금(禁)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 한복판에는 2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생김새가 용(龍)의 형상(形象)이어서 마을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부르고 있다.

      이웃마을 경암(송암2리)에는 약 500년 전 전촌(前村)이 형성되던 해부터,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뒷산에서 각종 산 짐승들이 밤마다 민가(民家)에 내려와서 가축(家畜)과 사람들을 괴롭히므로 살기가 어려웠다. 부락에서는 이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함정도 파고 밤마다 장정들이 지키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자 이 마을 대표로 있는 김문장(金文長, 金海)이란 분이 착안하여, 제당(祭堂)을 짓고 매년 정월 보름날에 각종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니 이후부터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1971년 새마을사업 이후 젊은 층에서 제당(祭堂)을 철거하고 동제(洞祭)도 지내지 않으므로 지금은 빈터에 잡초(雜草)만 무성하다.
  • 벼락고개 (別樂고개)
    • ㅇ 위 치 : 용궁면 월오1리

      ㅇ 내 용

      약 200년 전 산택리와 월오리를 연결하는 소로(小路)가 있었는데, 이 소로 위에는 높은 고개가 있어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가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여름장마가 계속되는 어느 날 벼락이 심하게 떨어지면서, 이 높은 고개가 낮아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통행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 벼락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벼락고개」라 불렀다. 또한 높은 재를 넘기가 거북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벼락과 유사한 별악(別樂)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애칭(愛稱)도 가지고 있다.
  • 김씨 집 머슴 `당당‘
    • ㅇ 위 치 : 용궁면 대은2리 (동림마을)

      ㅇ 내 용

      용궁면에서 서북쪽으로 약 6㎞ 정도 떨어진 동림마을(대은 2리)에 전해 오는 전설이 있다.

      500여 년전 동림골 김씨 집에는 아주 힘이 센 머슴이 살았는데, 이름은 “당당”이요, 키가 8척(八尺)에 힘이 장사였으며, 천성이 태평스럽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주인이 당당에게 일꾼 열다섯 명을 구해서 논둑 50두락을 가래질 하라고 시켜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 때가 되어 며느리가 점심을 내어가니 머슴은 혼자 나무 아래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고 있는지라 하도 기가 막혀 집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시아버지께 알리니 어른은 하던 일은 멈추고 갓을 쓰고 고개마루로 나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이 힘센 머슴이 15인분 밥을 한꺼번에 먹어치우고는 열다섯(15) 사람의 몫을 혼자서 거뜬히 해치우자, 고개마루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인이 하도 기가 막혀 갓잖다고 부르게 된 것이 「갓재말랑」이다.

      당당은 원체 힘이 센 장사여서 하루는 지게를 지고 회룡(回龍)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득히 해 가지고 동림마을로 돌아오는데 나뭇짐이 워낙 커서 백여 미터나 되는 마을 입구에 걸려 도저히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할 수 없이 회룡들에다 지게를 세워 놓았는데 지나가는 까치들이 산(山) 인줄 잘못 알고 집을 짓게 되자 그 자리를 「까치골」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동림마을은 대대로 조를 많이 재배하여 왔는데 가을이면 추수(秋收)를 하여 정선을 할 때 보통 사람은 풍석자리로 부치느라 야단인데 당당은 집채만한 멍석을 한 손에 한 개씩 부쳐대니 가래조가 3백여 m나 떨어진 학당(鶴塘)까지 날아가서 산처럼 쌓이는 바람에 학(鶴)이 군락(群落)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이계(李桂) 바위
    • ㅇ 위 치 : 용궁면 대은2리 (회룡)

      ㅇ 내 용

      용궁면에서 동남쪽으로 약 6km 정도 들어가면 회룡(回龍)마을이 나온다.

      회룡이라는 말은 태고(太古)에 용이 내성천(乃城川)을 타고 상류를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는 20여명이 앉아도 좋을만큼 커다란 바위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있어서 풍류(風流)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인데다 바위 아래로는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그 옆으로는 소(沼)가 형성되어 사시사철 나룻배가 넘나들고 있었으니 고을관리들과 기생(妓生)들의 놀이터로 유명한 장소였다.

      4백여 년전 햇살이 따가운 어느 여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계(李桂)라는 기생이 고을 관리들과 어울려 놀이를 즐기고 있던 중 발을 헛디뎌 소(沼)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놀란 관리들은 어쩔 줄을 몰라 발을 굴리고 있을 뿐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정신을 차려 바위 밑을 찾아보니 이계는 간 데 없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동굴(洞窟)이 보였다. 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깊고 컴컴하여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후 내용을 전해들은 사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계가 놀던 바위를 「이계바위」라 칭하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비가 오는 날이면 동굴속에서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하고 날씨가 맑고 좋은날이면 강 상류 30리 밖 개포면(開浦面) 동송마을의 떡방아 찧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동굴속으로 들리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지금부터 50년 전만 하여도 가뭄이 극심할 때면 부락주민들이 정성스레 제사를 지낸 다음 독한 약초와 물풀을 돌로 찧어 그 즙을 물에 풀어 동굴속으로 밀어 넣으면 그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 같은 괴상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비를 못 내리게 한 악귀(惡鬼)가 승복(承服)을 하여 해질 무렵이면 비가 내려 가뭄을 해소(解消)시켜 주었다고 전해진다. 근래에는 토사(土砂)가 퇴적(堆積)되어 소가 얕아지고 동굴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 바위만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이 곳 마을에는 유씨 과부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을 훌륭히 키우기 위하여 구읍(舊邑 : 현 용궁면 향석리)에 있는 향교(鄕校)에 글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석교(石橋)를 건설하였다고 하여 이 개울을 과부의 성(姓) 따서 「유들천」이라고 한다. 현재는 상판은 내려 않았고 돌 교각(橋脚)만 개울 속에 묻혀있다.

      당시 향석리 마을은 옛날 용궁현(龍宮縣)의 소재지로 1407(태조 7)에 창건한 용궁향교(龍宮鄕校 : 유형문화재 제210호)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향교 앞에 있는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유교(儒敎)를 숭상하기 위하여 궁가(宮家), 종묘(宗廟), 왕장(王將), 성현(聖賢)의 탄생지 및 분묘 앞에 비석을 세워 계급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경우 말에서 내려 경의(敬意)를 표(表)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비(碑)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成均館) 동구에 세울 때 같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회룡마을 뒷산은 비룡산(飛龍山)으로 천년 고찰 장안사(長安寺)가 산중턱에 고즈막이 자리하고 있으며 등산로와 산책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는 깎아지르는 듯한 이 곳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산상(圓山城)이 있다. 이 성은 당시 얼마나 격전지였든지 성아래 마을인 성저(城底)마을에 비가 많이 오면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원귀(寃鬼)의 소리가 지금도 들려온다고 한다. 이 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마한(馬韓)의 마지막 남은 산성으로 백제(百濟)의 온조(溫祚) 7년에 패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城) 주변에는 많은 고분(古墳)이 있으며, 봉수대(烽燧臺)와 군창지(軍倉址)도 있다.

      장안사 뒷산에 있는 회룡대(回龍臺) 정자에 올라가면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육지 속의 섬마을 “의성포(회룡포)마을”의 절경(絶景)이 한눈에 바라보이며, 산아래 회룡마을에는 『회룡포(回龍浦)』 주변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의 모습을 새겨 놓은 용주팔경(龍州八景)의 시비(詩碑)가 있다.
  • 석전(石戰)놀이 - 싸움을 크게 하면 그해 농사 대풍년
    • ㅇ 위 치 : 용궁면 향석,대은리(불쓴바위)

      ㅇ 내 용

      향석리와 대은리에는 언제부터인가 전해내려 오는 놀이가 있다. 그것은 석전(石戰)놀이인데 말 그대로 돌을 던져 서로 싸우는 것으로 얼핏 들으면 놀이인지 싸움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으나 성격으로 보면 싸움이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이 지역이 고대국가(古代國家)인 신라의 변방(邊方)으로 전쟁의 준비 또는 전쟁훈련과 관련된 놀이로 추측되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이 전래놀이는 부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놀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놀이를 “팡개싸움” 혹은 “팔매싸움”이라 하는데 팡개란 ‘던지다‘는 뜻을 가진 독특한 사투리로서 50대 이상 장년들에게는 어릴 때의 기억을 한 번쯤 되새겨 보게 하는 놀이이다.

      석전놀이와 불싸움은 향석리(鄕石里) 주민 150여 호와 대은리(大隱里) 주민 150여 호의 동민들이 두 마을의 경계인 축산(竺山 : 불쓴바위 부근) 능선에서 정월 대보름 날 초등학생 또래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차츰 연령이 많아져 40세 미만의 장년층까지 싸움이 이어진다. 40세 이상이 되면 이 싸움엔 참여하지 않고 중재자(仲裁者) 역할을 하며 과열(過熱)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하고 격렬한 투석전과 불싸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쳐 병원에 가거나 시비가 걸려 싸우는 일이 없으며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거의 가벼운 상처를 입는다. 이러한 위험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싸움을 크게 하면 할수록 그 해 농사가 대풍년(大豊年)이 들고 좋은 일이 생기는 반면, 작고 흐지부지하게 되면 흉년(凶年)이 들거나 마을 안에 강간(强姦), 살인(殺人)이 끊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끝나면 농사철이 되어 들판에서 일을 하다 만나거나 인근 장터에서 서로 만나도 일제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불문률(不文律)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놀이도 한국전쟁(1950년)때까지 계속 이어져 오다가 지금은 사라졌으며, 두 마을 학생이 한 학구(學區)인 향석초등학교에서 배움을 같이한 이후부터는 화목(和睦)하게 지내고 있다.

      당시 격렬하게 싸웠던 불쓴바위 산자락에는 잡초(雜草)만 우거져 있고 그 옛날 악동들은 저마다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 산 성 (山城)
    • ㅇ 위 치 : 용궁면 향석2리 성저마을 (향석2리 뒷산 비룡산)

      ㅇ 내 용

      부족국가(部族國家) 또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초에 축성(築城)한 것으로 추측되는 용주(龍州)고을의 산성으로 낙동강(洛東江)과 내성천의 합류(合流) 지점에 있는 전략상(戰略上) 주요 요충지(要衝地)이다. 당시 성주(城主) 백(白)장군이 이 성을 지켰는데, 장군에게는 하루에 천리(千里)를 달리는 애마(愛馬)가 있었다. 하루는 백 장군이 말(馬)과 시합을 하기로 하고 내기를 하였는데 말에게, “내가 활을 쏘아 성문 기둥에 너가 먼저 닿으면 너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로되, 화살보다 늦으면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그는 성(城)에서 서쪽 들판 약 2㎞ 지점에서 화살을 쏜 후 달려와 보니 화살은 이미 와 있는지라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 重千金)이라 눈물을 머금고 애마의 목을 치고 나니 그때서야 화살이“딱”하고 성문기둥에 와 닿으므로 백 장군은 무척 애통해 하였다. 그전에 쏜 화살을 이번에 쏜 화살로 착각하고 애마(愛馬)의 목을 벤 그는 후회(後悔)하며 말의 무덤을 정중히 만들어 주고 후히 장사(葬事)를 지내 주었다. 당시 시합했던 들판 일부를 지금도 「말무덤재」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이 성은 원산성(圓山城)이라고도 부른다. 토석(土石) 혼축으로 된 이 성 부근에는 많은 고분(古墳)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烽燧臺)와 군창지(軍倉址)도 남아있다.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남하(南下)할 때 마한(馬韓) 최후의 보루(堡壘)인 이곳을 점령한 후 백제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상당기간 백제의 요새(要塞)로서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얼마나 격전지였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 오면 성 아래 마을인 성저(城底)마을에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원귀(寃鬼)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고구려(高句麗)의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하다 아차성에서 전사(戰死)하였다고 하나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이곳은 육지 속의 섬마을로 유명한 절경의 회룡포(回龍浦)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둘러 쌓여 있다.
  • 마주목(馬柱木)
    • ㅇ 위 치 : 용궁면 무이2리 (외무)

      ㅇ 내 용

      약 5백년전 신비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나무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마주목(馬株木)이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를 지낸 추월헌(秋月軒) 백진양(白震楊 : 1508~1591)이 무이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끔찍이도 사랑하는 한 필(匹)의 애마(愛馬)가 있어서 늘 집 앞 우물가에 있는 이 나무에 매어두었다고 하여 마주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의 일이다.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애마(愛馬)를 타고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싸움에서 이기고 공(功)을 세우면 이 나무가 살아있을 것이요, 내가 공을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이 나무도 말라죽을 것이다?하는 말을 남기고 싸움터로 떠났다.

      얼마 뒤, 말만 돌아오고 백장군(白將軍)은 돌아오지 않은 채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 그 후 이 말이 죽자 마을에서는 마을 앞들에 정성스레 묻어주고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묻어준 곳을 “말무덤”이라 하고 그 주변의 논을 “말무덤배미”라고 하여 근래(近來)까지 전해져 내려오다가 1976년도 경지정리(耕地整理) 때 없어져 말무덤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수 백년이 지난 마주목(馬柱木)은 지금 당장 칼로 껍질을 흠이 나게 하여 살펴보면 아직도 썩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 수 있으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백 장군의 애국충절(愛國忠節)과 호국정신이 아직까지 남아있음을 이 나무가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한다.

      백 장군은 외무 서쪽산의 선영하(先瑩下)에 의관장(衣冠葬-전사자를 유품만으로 장사지냄)하였다. 그는 후손이 없으며 그 방손(傍孫)들이 묘소를 관리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이 나무는 높이 130cm, 둘레 12cm로 지금도 이 마을 이정행씨 집 앞에 현존하고 있으며, 1997년 수원 백씨 문중에서 당시 대창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정양수 선생의 글을 받아 마주목전설비(馬柱木傳說碑)를 세웠다.

      <예천군지(醴泉郡誌)>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주목(馬柱木) 재용궁(在龍宮) 무이촌(武夷村) 정상(井上) 임진(壬辰) 계마우차고명(繫馬于此故名) 전무지엽(全無枝葉) 여식일주이도험피(如植一柱以刀驗皮 소무후패(少無朽敗)”라 기록되어 있다.
  • 부부애(夫婦愛)를 전해 주는 신비(神秘)의 나무
    • ㅇ 위 치 : 용궁면 가야2리 (국도4차선 옆)

      ㅇ 내 용

      가야2리 동쪽 들판 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와 이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소나무와 버드나무는 서로 마주보고 서 있어 옛부터 내외(內外)나무로 칭하여 불러왔으며 마을에서는 이를 동신목(洞神木)으로 정하여 매년 정월 보름날 새벽에 부락 주민들 중에서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골라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선택된 사람 내외(內外)가 정성스럽게 정결한 음식을 준비할 동안 부정한 사람은 주위에 오지도 못하며 제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가야리 서쪽 5km 이내 지역인 방마티 새마을 기슭 버드나무 아래에 녹양(綠楊)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선비들이 글도 읽고, 여가(餘暇)를 즐기는 휴양정자(休養亭子)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해 긴 여름날 장마와 홍수로 인하여 이 버드나무와 녹양정자가 가야마을로 떠내려와 동쪽 강신(降神)터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버드나무는 거꾸로 처박혀서 되살아났다고 한다. 또한 그 옆에 흐르는 냇물에는 소(沼)가 생겼다. 거꾸로 되살아난 버드나무의 영험함을 보고 사람들은 그 나무를 섬기었으며, 제방(堤防)에 있었던 소나무도 둑이 없어지면서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마주보게 되었는데, 동네에서는 마치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이 할아버지,할머니의 모습과 같아서 소나무를 할아버지나무로, 버드나무는 할머니나무로 불렀다. 제사 첫날은 할머니나무에 한 잔을 붓고 그 혼(魂)을 할아버지나무로 모셔가서 제사(祭祀)를 지내며, 다음날은 온 동민이 함께 모여 제관(祭官)에게 감사를 표하고 음복(飮福)한다고 한다.

      몇 해전 농로를 포장하기 위하여 이 버드나무를 베려하다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나무는 슬픈 표정의 모습으로 할아버지나무인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구해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으며 소나무는 몹시도 화가 난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다가와 덮칠 것 같아 버드나무에 손도 대지 못했다고 하니 가히 신기(神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지역(地域)의 수호신(守護神) 용두소(龍頭沼)
    • ㅇ 위 치 : 용궁면 금남리 (금천)

      ㅇ 내 용

      용궁면 소재지에서 남쪽 금남 6km(15리) 지점에 삼강진(三江津)이 있으며 낙동강의 합류지점이다. 이 삼강진(지금은 풍양면 삼강리이나 행정구역 통폐합 전에는 용궁군 남상면 삼강리) 아래에 용담소(龍潭沼)라 하는 소가 있는데, 이 소의 수심(水深)은 명주실 고리를 세 개나 이어도 모자랄 정도로 그 심도(深度)를 측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소의 밑바닥은 끝없는 동굴로 이어져 있고 그 안에 용이 살고 있어, 한해(旱害)가 심할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야만 한해를 막을 수가 있었다. 또한 남서쪽 1km 지점에는 용두진(龍頭津 : 금천에서 흐르는 물이 삼강에서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지점)이 있어 용두암(龍頭岩)이란 거암이 금천(錦川)에 돌출하여 용두산두를 이루었으며 이 용두암 밑에 흐르는 금천(錦川)은 소(沼)를 이루고 있으니 이를 용두소(龍頭沼)라 불렀다. 이 소도 용담소와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깊어 항상 짙은 푸른빛을 띠었는데 한 번도 고갈(枯渴)된 일이 없었으며 용두소와 용두암 사이에 동굴이 있어 용이 은식(隱息)하고 있었다.

      앞의 두 소(용담소와 용두소)의 물밑은 서로 통할 수 있는 광활한 별류천지(別類天地)를 이루고 있어 용두소를 숫용(雄龍), 용담소를 암용(雌龍)이라 하였는데 부부(夫婦)가 된 용은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 한해(旱害)가 있거나 질병(疾病)으로 인한 재앙(災殃)이 있을 때는 용왕(龍王)에게 정성을 드리면 효험(效驗)이 있었다고 전한다.

      용궁면(龍宮面)의 지명 유래도 이 두 소용(沼龍)이 이루어 놓은 수중용궁(水中龍宮)과 같이 지상의 낙원(樂園)으로서 용궁을 이룩하려는 선인(先人)들의 기상과 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인심이 좋아(人心和樂) 생활에 부족함이 없는 용궁, 수중 용궁을 방불케 하려는 용궁인(龍宮人)의 웅지(雄志)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곳 마을 금원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팽나무 「황목근(黃木根),천연기념물 제400호)이 있는데 마을에서 공동재산(共同財産)인 토지를 이 나무에 등기(登記)하면서 5월에 황색 꽃을 피운다는 뜻에서 “황(黃)”이란 성과 “목근(木根)”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본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석송령(石松靈)과 같이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 내는 부자나무로 유명하다.

 

 

   출처 : http://city.ycg.kr/open_content/main/?citycode=yongg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