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양성 힘쓰던 선비정신 느껴져
예천 금곡동 추원재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 추모위해 건립 1988년 경북도 민속자료 제82호 지정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금당실이 있다.
조선시대 풍수가로 널리 알려진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에도 이 마을 만큼은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이 아쉽다"고 해 '금당맛질 반(半)서울'이란 향언도 생겨났으며 이처럼 용문 금당실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다.
금당실에는 감천 문씨 문억향의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1496~1553)이 함창에서 옮겨 왔다.
함양 박씨 박종린은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 외사촌이며, 외조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다. 이후 금당실의 함양박씨들은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해 명문으로서 지위를 굳히게 된다.
박종린(朴從鱗·1496~1553)은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한다.
그 후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및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는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해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벼슬을 그만두고,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금당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 올리는 금곡동 추원재 및 사당(上金谷洞 追遠齋 및 祠堂)이 있다. 이 건물은 1532년(중종 27) 과거에 합격한 이후 홍문관 교리와 이조정랑을 역임한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朴從鱗)을 추모하고 제사하기 위해 1656년(효종 7)에 건립한 것으로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2호로 지정됐다.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 추원재(강당)·대문간 등 4동이 동일 축선상에 배치되고, 담장의 오른쪽에는 영사정이 별도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추원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오량가 구조의 익공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장대석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둔 오량가 맞배지붕집이다. 이 집은 기둥 상부의 익공쇠서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넣어 짜임과 양식이 매우 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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