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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도 반해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명당

한 글 2010. 12. 17. 09:31

 

 

조선 태조도 반해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명당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51. 예천 상금곡리 추원재·사당

 

 

 

 

상금곡리 추원재전경.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금당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정록감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에도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풍수가로 널리 알려진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는 이곳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지만 큰 냇물이 없이 아쉽다고 하여 '금당맛질 반(半)서울'이란 향언도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용문 금당실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이재완 학예연구사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와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예천 상금곡리 추원재 및 사당(경상북도지정 민속자료 제82호)에 대해 알아본다.

 

금당실은 '배날들'을 사이에 두고 위쪽의 '윗금당실', 아래쪽의 '아랫금당실'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행정구역상 윗금당실은 상금곡리, 아랫금당실은 하금곡리로 구분된다.

 

'금당실'이란 이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옛날 중국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 입구에 학고개가 있고, 오른쪽 어깨에 개고개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금계(金鷄)가 앞에 있고, 옥견(玉犬)이 뒤에 있는 것이 마치 중국 양양 고을의 금곡(金谷)과 같다"고 했다.

 

상금곡리는 배산임수형 마을로 뒤쪽에는 오미봉(五美峰)을 비롯한 해발 200m 내외의 산들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금곡천(金谷川)이 휘감아 흐르는데, 금곡천 주변에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하여 금당실 사람들은 명당에 걸맞게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마을 뒤쪽 계곡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쉽게 피난 갈 수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주변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복된 땅이라고 전했다.

 

금당실에는 감천 문씨 문억향의 사위인 함양 박씨 박종린(1496~1553)이 함창에서 이사해 세거했다.

 

함양 박씨 박종린은 퇴계 아버지인 이식의 처외사촌이며, 외조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다. 이후 금당실은 함양 박씨들이 대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면서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박종린(朴從鱗, 1496~1553)은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했다.

 

그 후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1536년)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및 문학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까지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1536년)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벼슬을 그만두고,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박종린은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세칭 향오린(鄕五鱗:형제 5명이 모두 문과에 등과)이라 불렸는데, 그의 형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에 아버지 박눌(朴訥)이 병조참판에 추증(1533년)되기도 했다.

 

 

 

사당 기둥에 연꽃무늬 새겨 '예스러움' 더해

 

이재완 학예연구사에게 듣는 건축양식

 

금당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을 올리는 금곡리 추원재 및 사당(上金谷洞 追遠齋 ·祠堂)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1532년(중종 27) 과거에 합격한 이후 홍문관 교리와 이조정랑을 역임한 함양박씨 금당실 입향조인 박종린(朴從鱗)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656년(효종 7)에 건립한 것으로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2호로 지정되었죠.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 추원재(강당) · 대문간 등 4동이 동일 축선상에 배치돼 있고, 담장의 오른쪽에는 영사정이 별도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답니다.

 

추원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며 막돌기단을 쌓고 막돌초석을 두었으며 앞면에는 둥근기둥을, 나머지에는 네모기둥을 세웠습니다.

 

또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오량가 구조의 익공집입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장대석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둔 오량가 맞배지붕집이기도 하죠. 이 집은 기둥 상부의 익공쇠서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했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넣어 짜임과 양식이 매우 예스럽다할 수 있습니다.

 

이 학예사는 "금당실은 사람이 잘살 수 있었던 복된 땅이자,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세거지로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며 "향후 예천지역 인물들을 주제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인물과 연계된 관광지 개발에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www.kyongbuk.co.kr/main/news/news_content.php?id=519448&news_area=120&news_divide=&news_local=33&effect=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