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또다른 ‘장물’ 청구대학
[왜냐면] 망각이냐 외면이냐: 영남대 사건의 경우 / 최찬식
요즘 매일같이 “장물 정수장학회” 이야기가 언론에 나온다. 하지만 대구의 ‘영남대학교’는 관심 밖에 놓여 있다. 이 대학 전신 중의 하나인 ‘청구대학’의 설립자인 야청 최해청은 오래전에 그 대학교를 “장물”이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1300여쪽에 이르는 <영남대학교 50년사>에는 청구대학을 설립자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인 1988년, 국정감사에서 영남대의 성립 과정이 호되게 성토됐다. 또 2005년에는 국회에서 백원우 의원이 학교 정관에 ‘교주 박정희’라고 적혀 있는 것을 문제 삼았지만 국민의 묵살 속에 파묻혔다. 청구대학 설립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한 것처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이번에 드디어 민주통합당의 김부겸 의원이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그 용기가 놀랍기도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설립자 뜻과 달리 영남대로 통합된
청구대학…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건 아니지만 그 ‘장물’을 움켜쥐고
정보부를 동원해 묵과한 건 그였다
그동안 이 문제를 묵살하려는 분위기에서 사건의 경위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그 대략을 훓어보려고 한다. 청구대학은 5·16 군사 쿠데타 뒤 군사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10여년을 4년제 대학으로 운영된 학교를 ‘물리적 잣대’로 평가하여 2년제 대학으로 강등시켰다. 군부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쿠데타 직후 각종 정비사업을 통해 성과를 과시해야 했던 상황에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설립자의 쇼크는 컸다. 다행히 그해 졸업생 성적이 전국 4위에 오르는 등 실력이 증명되어 4년제로 복귀는 되었다.(한때 토목건축 분야에서 한강 이남에 청구대학을 제일로 꼽았다.) 하지만 수모를 겪은 설립자는 병설학교를 짓고, 타교를 합병하고, 교정을 늘리는 등 각종 재정 지출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정부의 그릇된 교육정책이 학교를 망치게 한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설립자가 서울 등 외부 출장이 잦아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지자 어느 경리직원이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학교 재정은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이 사건은 당시 교내에서도 공인된 사실이다.) 설립자·학장은 일부러 서울에서 계리사를 초빙하여 경리감사를 위탁했다.
학교는 원래 학교를 세우려고 기금을 모으고, 이사들이 모여서 학장을 초빙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청구대학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설립자가 한 언론인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을 다시 해야겠다며 ‘독립운동국’을 설치하고, 대중학술강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다. 1947~48년 당시 이 나라 사회상이 새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독립운동국’이란 간판을 내걸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좌가 끝난 뒤 청강생들의 열성 때문에 영구적인 시설로서 성인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설립자는 이사들을 모집했고 자신은 학장, 즉 최고경영자로 진두에 서서 18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경영에 몰두했다. 그런데 1966년 12월 말, 위에 말한 재정난과 더불어 교내 인사 문제 등이 겹쳐 돌연 이사장 전기수씨는 이사회를 소집해 학장을 해임시킨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설립자인 학장에 맡긴 체제였고 마침 설립자는 이사회를 개편하려는 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청구대학 자체의 존망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설립자를 ‘명예학장’으로 모시고 자문에만 응해달라는 태도였다.
문제는 1967년 6월15일, 건축중인 신교사가 붕괴하여 사망자가 발생하며 일어났다. 건축물의 설계를 둘러싸고 형사 문제가 돌출한 것이다. 설립자는 1966년 말 신교사 건립에 착수했지만 그것은 원래 3층 설계였다. 하지만 새 경영진은 욕심을 내 6층으로 지어 올렸으니 설립자의 개입을 한사코 막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학교를 청와대에 진상하는 자구지책을 찾게 된다. 설립자에게는 일언반구 상의 없이 청와대 주인에게 진상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설립자와 잘 아는 사이였다. 설립자는 그를 만나러 안간힘을 다했으나 1977년 돌아가실 때까지 청와대는 철문을 닫은 듯 만나주질 안았다. 쿠데타 직후엔 고향 선배라며 설립자에게 자문까지 하는 관계였는데 말이다. 설립자는 시민의 서명을 받아 대통령과의 면담를 성사시키려 시도했지만 이때 중앙정보부가 나서 잠자코 있으라는 공갈·협박을 했다. 처음에는 지조 없는 간부 교수와 이사회가 잘못을 저질렀지, 대통령이 가져오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물’을 움켜쥐고 중앙정보부를 동원해서 그것을 묵과한 것은 대통령이었다.(학교 문제를 왜 교내에서 해결하지 않고 정치권력에 가져갔느냐고 주모 교수들을 힐책한 사람이 있었으니 국문학자 조윤제 박사였다.) 그래서 영남대학 설립 문제를 ‘사학분쟁’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 잘못된 분류이다. 이것은 한 개인이 청와대란 절벽에 대항하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1967년 말에는 이병철씨가 맡고 있던 ‘대구대학’을 가져와(대구대 설립자의 동의 없이) 이후락씨는 양 대학을 합쳐서 ‘영남대학교’라 이름지었다. 그후로는 박정희의 ‘왕립대학’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설립자 입장에서 볼 때 그 학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장물’에 지나지 않는다. 18년 동안 피땀을 기울여 쌓아올린 청구대학을 설립자의 손에서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대구대학 쪽도 최준 선생 집안의 역대 재산을 관리실수로 다 날려버린 것을 호소하고 있다. 내가 한번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영남대 동창회를 찾았더니, 학교의 한 간부가 “우리는 절대로 과거 얘기를 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명색이 학교로서 개탄하다 못해 웃기는 말이었다. 과거를 숨겨야 살아남는 학교라니.
‘왕’이 간 뒤에도 ‘왕립대학’을 지탱해온 것은 역대 교육부의 ‘교육정신’ 빠진 교육행정의 소치였고, 대중의 외면과 묵살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처음 청구대학을 청와대로 넘긴 한 간부 교수가 “지극히 잘못된 일”이었다고 양심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또 한가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왕년에 이름을 날린 한 언론인이 박 대통령에게 왜 잘 아는 청구대학 아무개를 그렇게 대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그 사람, 내게 ‘당신’이라 했다”고 하더란다. 설립자는 박 대통령과 단둘이 차를 타고 경주에 가는 도중 박 대통령을 그렇게 부른 적이 있다고 한다.
영어에 ‘적은 우리다’(Enemies are us)란 말이 있는데, 과연 적은 우리 모두다. 다만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원리원칙에도 철저한 것 같으니 여기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최찬식 야청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22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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