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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동입석(上仁洞 立石) - 당산어린이공원

한 글 2012. 6. 1. 14:23

 

 

상인동입석(上仁洞 立石) - 당산어린이공원

 

똑딱일시 : 2012년 6월 1일, 오후.
똑딱위치 : 상인로9길25(상인동 1569-1)

 


달서구 비지정문화재(글 : 달서구청)
이 입석은 달배마을 어귀의 밭(田)에 있었는데 현재는 어린이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곳은 대덕산(大德山)과 산성산(山城山)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아랫부분으로 월배(月背) 선상평야의 정점(頂點)이 되는 곳이다, 석재는 화강암이고 장축은 동-서향이며 크기는 높이 250cm, 길이 170cm, 폭 100cm이다.

 

 


 월배(月背) : (글 : 대구시청)

 

현재까지 월배의 유래를 밝혀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지역명칭의 유래를 이야기하는 설은 몇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달’은 고어로 ‘높은 곳’이나 ‘높은 산’을 뜻하는데, 바로 상인동의 임휴사가 있는 골짜기가 앞산의 등[背]과 같은 높은 위치에 놓여 있어 ‘달배골’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 하고, 많은 우리말 땅 이름이 한자화하면서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달배[月背]’도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원 뜻은 ‘고배(高背)’ 또는 ‘산배(山背)’가 바른 표현이나 높다는 뜻의 ‘달’을 밤 하늘의 달 즉 ‘월(月)’로 적었으니, 지금의 ‘월배(月背)’는 이 골짜기의 이름 ‘달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대덕산과 청룡산이 마주쳐서 만들어 낸 골짜기가 현재의 ‘달비골’인데, 이 계곡이 현재는 개발이 되어 골짜기가 얕게 되었으나 예전에는 골짜기가 아주 깊어서 달이 뜨면 달빛이 계곡에 비춰진다 하여 ‘달이 비치는 골짜기’ 즉 ‘달비골’이라 하였는데 ‘달비’가 한자와 하면서 ‘달배(達背)’ 즉 ‘월배(月背)’ 되었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월암동 서북쪽에 약 6개의 바위가 200~300m 간격으로 마을을 둘러서 서 있는데, 윗 쪽에 있는 것을 ‘윗선달배이’, 아래쪽에 있는 것을 ‘아래선달배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선’은 ‘서있다’는 말이고, ‘달배이’는 ‘돌배이’라는 말로 고어에서는 ‘돌’을 ‘달’로 표현했다. 따라서 ‘달배골’도 ‘큰 돌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현재에도 달비골 안에는 큰 바위들이 많이 있지만 개발 전에는 더 많은 바위들이 있었다. 따라서 ‘월배(月背)’라는 지명도 ‘달배골’의 ‘달배(達背)’에서 음과 뜻을 따서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달배골’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다.어쨌든 순수한 우리말인 ‘달배(達背)’가 한자화 하면서 ‘월배(月背)’가 되었다는 데는 이의가 없고, 이의 영향으로 ‘월촌(月村)’, ‘월암(月岩)’, ‘월성(月成)’ 등의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월배’라고 불리는 곳은 조선시대 대구부(大丘府)의 속현인 화원현(花園縣)의 ‘월배방[月背坊, 치소(治所), 본리리(현 상인동)]’과 ‘조암방[組巖坊, 치소, 월성동]을 아우르던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낙동강의 화원창(花園倉)에 가깝고 대구부에서 멀지 않은 농촌지역이었다.

 

 

월배지역은 남쪽으로 비슬산을 바라보고, 낙동강을 옆에 끼어 일찍부터 취락 발달의의 조건이 마련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국내의 어느 지역에 못지 않게 선사시대인 청동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국가사적 제411호로 지정된 진천동의 입석 유적을 비롯하여 월성동의 주거지 및 고분, 지석묘, 송현동의 주거지, 상인동의 입석 및 고분, 지석묘, 도원동의 고분군, 월암동의 입석 등을 비롯하여 현재도 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선사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월배에는 화원현과 별도로 ‘영암현(靈巖縣)’이라는 또 하나의 독자적인 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금성지(錦城誌)』에는 전하는 말을 인용하여 월배방 도복평(都福坪)에 고읍기(古邑基)가 있었는데, 전답 중에 동헌기(東軒基), 객사기(客舍基), 옥기(獄基) 등의 명칭이 있었고, 『금성지(錦城誌)』를 편찬하기 몇 년 전에는 농부가 ‘영암현와(靈巖縣瓦)’라고 인자(印字)되어 있는 고와(古瓦) 일편을 습득하였는데, 이는 필시 ‘영암현’의 관기(官記)라고 믿어지나 그 ‘영암현’의 설치가 언제인지 문헌에는 없어서 징험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고인(古印) 한 개를 주워 관에 바치니 관에서는 호장(戶長)에게 주어 조선후기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도복평(都福坪)은 ‘월배방’에 속하나 한 때에는 ‘조암방(組巖坊)’을 ‘영암방(靈巖坊)’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암방’이 옛 ‘영암현’의 터임을 알 수 있다. ‘영암현’이 폐지된 것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관노가 수령을 살해하는 변고로 현 자체가 폐지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배’는 유래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달비골’의 이름을 따서 ‘달배’ 또는 ‘월배’라 하였다고 한다. 대구부에 속하여 7개리[원덕, 도원, 진천, 오복, 상인, 채정, 본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존 월배면과 조암면의 대천동, 상동, 하동과, 인흥면의 송정동, 화현면내의 부미동 일부를 병합하여 달성군 월배면으로 소속이 바뀌었고[도원, 대천, 상인, 유천, 월성, 월암, 진천의 7개 동으로 동명을 개편하여 관할],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다시 성서면의 송현동을 병합하여 달성군에 환원 되었다가 1973년에 화원면의 대곡동을 편입하였고, 1981년에 대구직할시 승격 시에 다시 대구시 남구에 편입되었다. 편입될 당시 남구 월배1, 2동과 송현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월배1, 2, 3동과 송현1, 2동으로 나누어 편입되었고, 현재 도원, 대곡, 대천, 상인, 송현, 유천, 월성, 월암, 진천 등의 9개동의 지역이다. 행정동명으로는 송현1, 2동, 상인1, 2, 3동, 도원동, 진천동, 월성1, 2동 지역이다.대구시의 외곽지역으로 농업과 공업이 혼재한 성격을 띠고 있던 ‘월배’는 1980년대부터 대구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지역으로 개발이 진행되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월성지역이 대단위 주거지로 바뀌었고, 1990년대 초 상인지역 또한 대단위 주거지화 하였으며, 1990년대 말에 와서는 도원동지역[현 대곡지구아파트단지]까지 대단위 주거지화 하여 대구의 대표적인 주거구역이 되었다. 한편 그나마 남아있던 대천동, 유천동, 월암동 등 일부 자연마을들도 근래에 와서 아파트단지로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서 머지않아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상인동입석(上仁洞 立石) 사진

 

 

 

 

 당산어린이공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