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 - 두류공원 - 성당못
똑딱일시 : 2012년 6월 16일 오후
똑딱위치 : 대구 달서구 두류동 및 성당동
두류동(頭流洞)의 자연부락
두류동이란 지명은 이 곳에 있는 두류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988년 대구직할시 서구 일부와 남구 일부로 달서구를 신설하면서 서구 내당5동을 두류1동으로, 내당4동과 내당1동 일부를 두류2동으로, 내당6동을 두류3동으로 행정동의 명칭을 변경하여 두류동을 신설하였다.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1 구민지(救民池)
구민지는 두류1동의 가로 200m, 세로 300m, 가장 깊은 곳이 5m정도의 제법 큰 못이다. 이 못의 물을 이용하여 약 2만평(6.4㏊)의 천수답에 물을 대어 논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1971년 대구시 도시계획에 의하여 못을 메우고 주택지로 변경시켜서 현재 두류 1?2동의 주택지가 되었다. 이 못이 축조된 시기는 조선시대 중기이며, 안땅골(內塘山) 마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못을 막아 식량증산에 힘썼다. 그 당시 한발이 심해서 안땅골(內塘山) 사람들은 춘궁기에는 식량이 부족해서 생계가 곤란하였다. 이 못을 일컬어 빈민을 구제하는 못이라 하여 ‘구민지(救民池)’라 명명하였다 한다.
2 기와촌
기외촌은 현재 두류 1동의 일부로서 동네의 집이 대부분 기와지붕이라고 하여 ‘기와촌’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피난시절에는 천막을 치고 임시로 거주하던 곳에는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사라지곤 하였다. 사람이 기거하는 장소를 ‘촌(村)’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기와촌’이 아니라 ‘기와굴’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때 당시 황토로 기와를 굽는 가마 5개가 있었다. 옛날에 4명의 나병환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가 자식들에게 각각 집 1채씩 지어주어 거기에서 자식들이 살게 하였다.
3 당골ㆍ땅골
당골은 두류3동의 자연부락이다. 당나무가 있는 당골이 경음화되어 땅골이 되었다. 1887년 경에 안땅골이 유래되어 현재의 동명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땅골은 현 낙동강 수원지 앞 동북편 산 아래 고목 소나무 3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중에 한 그루의 나무를 당산목이라 불렀고 그 나무가 있던 동편 안쪽에 위치한 마을을 ‘안땅골 마을’이라 하였고 동남쪽(현 두류공원 야구장 서편)아래 위치한 마을을 ‘바깥땅골(외당산)마을’이라 불렀으며 마을사람들은 5월 파종을 끝낸 후와 10월 추수를 마친 후 술과 떡을 만들어 이 나무 밑에서 제를 올렸으며 이를 당산제라 하였다.
4 명목골
명목골은 두류 2동의 자연부락이다. 옛날에는 산이 깊고 숲이 우거져 온갖 짐승이 나왔으므로 낮에도 통행하려면 무서울 정도라는 ‘명목골’이란 명칭만 전해져 내려올 뿐 유래를 확실히 아는 이가 없다.
5 반고개
반고개는 두류2동의 고개이면서 자연부락이다. 대구의 동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로서 1997년부터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된 대서로의 두류네거리와 반고개네거리 중간지점인 이 고개에 대한 유래는 2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옛날에 성내로 시집온 성외 출신 새댁이 명절 때 차마 친정에 가지 못하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러한 심정으로 친정소식을 알고 싶어 고개 반쪽쯤에서 성외로 시집간 성내출신의 새댁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고, 둘째로 이 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라 하여 ‘반(半)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구전되어 오면서 ‘밤고개’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곳 주민들은 이 고개 부근에는 오래전부터 밤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밤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약 30년 전만 하여도 이 고개주변에는 인가가 별로 없었으며 언덕배기 밑은 넓은 논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논밭 사이에는 좁은 길이 이어져 있어서 성서, 동곡 방면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조선 말엽 물물교환이 성행할 때에는 상인들이 서문시장을 왕래할 때 주로 이 고개를 이용하였다. 당시의 반고개 주변에는 풀이 무성하여 소의 봇짐을 내려놓고 풀을 먹이기도 하였으며 성서, 동곡 방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팔기 위해 등에 지고 서문시장을 다닐 때 이 고개마루 정상에서 땀을 식히며 쉬어가기도 하였다.
현재의 이 고개는 폭 50m의 대로로 변모하여 옛날의 고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해지고 깨끗하게 단장되었다.
※ 참고. <반고개(半고개), 방고개(榜고개) 지명 유래>
(1) 서민층의 시집 온 새댁이 이 고개 반쯤에서 친정안부를 물었다고 기존 이름이 바뀌겠는가? 왕이나 정승쯤 되는 사람이었다면 바뀔 수도 있다.
(2) 고개가 높지 않은 고개라 하여 반고개라 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두 고개가 서로 가까이 있거나 같은 방향의 길에 있을 때 비교적 고개가 크면 큰고개, 작으면 작은 고개라고 하는 예는 많다.
예) 대구칠성시장에서 아양교 사이에 큰 고개와 작은 고개가 있다.
방고개(榜고개) :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에 400년 이상 대를 이어 농사만 짓고 살아오면서 방고개란 지명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945년 이후 버스안내 간판에 반고개, 밤고개 등 제멋대로 표기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방고개의 어원을 몰라서 반(半)고개, 밤(栗)고개, 방(榜)고개로 생각한 것이다. 방고개는 성서, 다사, 하빈, 성주, 고령 등지의 많은 주민들이 대구 서문시장에 나들면서 이 고개가 마지막 고개이므로 막쭉(마지막의 방언)고개라고도 했다. 이 고개는 많은 사람이 나들므로 방(榜)을 붙이기에 적지였는데서 유래됐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다.
예) 경북 마을지 중권(1992년도 발간) 548면에 방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도 방(榜)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1655년경 용궁현감의 손자인 아주 신씨 諱 락이란 사람이 마을 개척당시 이 곳에 방(榜)을 붙인 곳이라 하여 ‘방고개’라 칭하였다.
6 새터ㆍ시터
새터는 두류동의 자연부락이다. 현재 두류 2동의 일부로서 이전에 성주 이씨 집안이 모여들어서 남향으로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고 전해지며 ‘새터’ 혹은 ‘시터’란 원래 마을이 아닌 곳에 새로이 마을이 생긴 터라고 붙혀진 명칭으로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새터’라 이름하는 자연부락이 부지기수이다.
7 우시장
우시장은 두류 2동의 자연부락이다. 이의 유래는 옛날 소를 사고 파는 장소에 시장이 크게 형성되자 이 곳을 우시장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우시장은 2일과 7일마다 열리는 아주 큰 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 대구가 산업도시로 부상하면서 농업과 관련된 기타 모든 분야가 쇠퇴해지자 번성했던 우시장도 그 호기를 잃게 되어 우시장도 급기야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우시장이란 명칭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조그마한 시장이 하나 생겼으니 그것이 우시장이다.
우시장은 처음에 서문시장 서쪽 변두리에 있다가 1956년경에 현재 반고개역 서쪽 근방에 1차적으로 이전되었다가 내당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서 본리동(지루지마을) 가까이 있다가 사라졌다.
8 질매전ㆍ길매전
질매전은 두류2동의 자연부락이다. 왼쪽의 산과 오른쪽 산(두류산)이 어우러져 그 사이에 생긴 고개의 모습이 질매와 비슷하다 하여 ‘질매전’ 혹은 ‘길매전’이라 하였다. (글 : 대구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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