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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초간정과 병암정

한 글 2012. 3. 23. 13:21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예천 초간정과 병암정

 

 

자연이 허락한 정자, 수수한 詩 한 소절처럼 낭랑하다

 

그곳 은 무대이고 스스로 주인공이다. 그곳에는 낮과 밤, 해와 달, 하늘과 물, 바람과 비, 숲과 나무, 들판과 계절이 있고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선과 악, 기쁨과 슬픔이 있다. 때때로 그곳을 찾으면 깊이 경탄하였고 쓰리게 애통하였고 오래 기억하였다.


초간 권문해 선생이 세운 초간정.
◆ 초간정

넓지 않고 깊지 않은 금곡천이 넓은 바위를 만나 짧게 굽이친다. 개울은 수량이 적어 속이 훤한데 짧지만 각이 큰 굽이는 바위 아래에 짙은 초록빛 소를 만들어 놓았다. 바위는 힘차고 단단한 기반으로 자리하고 그 위로 몇 단 석축을 돋우어 정자를 얹었다. 굽어 흘러 멀어지는 개울가엔 하늘로 오르는 송림이 경건하고, 정자의 열린 마루에는 그 풍경들 태연히도 앉아 있다. 손바닥을 펴 정자를 지워본다. 완성되지 못할 회화다. 완결 없는 시다. 초간정, 수풀과 계곡의 정자는 수수한 시의 한 소절처럼 낭랑하다.


초간정은 1582년 조선 선조 15년에 초간(草澗) 권문해 선생이 세운 정자다. 초간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분으로 총 20권에 달하는 책의 완성에는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완성이 1589년, 그러니 초간정은 선생의 그 길고 치열한 작업과 시간적으로 함께하면서 공간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내려두는 휴식처이자 수양처로 자리했을 것이다. 긴 시간 뒷수발을 감내했던 부인이 사망하자 1591년 초간 선생도 세상을 뜬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동운부군옥’고본과 초간정은 소실된다.


초간정은 1612년에 중건되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탔다. 그 사이 ‘대동운부군옥’은 필사본으로만 남아 땅에 묻혔다. 그것이 빛을 보게 된 것은 1790년 7세손이 판각 작업에 나서면서부터다. 1836년에는 8세손에 의해 46년 만에 677장의 판목이 완성된다. 그리고 1870년 고종 7년에 초간정이 중창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그때 중창한 것으로 선생의 원고 등을 보관하기 위해 후손이 기와집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초간정 옆의 기와집들은 담장의 부드러운 곡선에 안겨있다.
정자 옆에는 몇 채의 기와집이 붙어 있다. 돌담의 부드러운 선으로 둘러쳐져 지붕만이 옹기종기 드러난다. 속으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어 이 건물들의 서사는 알 길이 없다. 개울로 내려가 보니 바위에 초간정 글씨가 새겨져 있고 정자의 측면에 ‘석조헌’ 현판이 걸려 있다. 저녁에 낚시를 하는 마루인가. 물고기가 낚일 리 없다 생각되지만 낚싯대 드리우는 유유함과 자적함이 은근하게 떠오른다.


금곡천에 가로놓인 흔들다리에서 초간정 방향으로 흐르는 개울과 주변 풍경.
환상적인 송림과 함께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초간정을 부러 멀리하며, 정자의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끔흘끔 보일 때까지 내려간다. 그 즈음 개울을 가로지르는 좁은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한 사람만이 지나갈 정도의 너비다. 다리 위 한가운데에서 물과 바위와 숲과 초간정의 조각을 바라보고 다시 숲을 크게 휘돌아 초간정이 선택한 자연과 자연이 허용한 정자를 이리보고 저리 본다. 이곳의 본질적인 사명은 매혹하여 평온을 주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머리와 가슴 잔잔하여도 반하고 탐하는 데 부끄러움 없었다.



◆병암정

병풍 같은 바위 위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정자 병암정. 바위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에 석가산이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다.
눈앞에 병풍 같은 병암이 우뚝 서있다. 의젓하고 빙하처럼 차가운 바위다. 그 위에 담장으로 몸을 가린 건물 한 채가 놓여있다. 병암정이다. 이유인은 구한말 중인 출신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업고 경상감사, 한성판윤, 법무대신 등의 요직을 맡아 승승장구했던 인물로 일본과 맞선 항일 운동가였고 덕수궁의 수리를 맡았던 건축가이기도 했다. 병암정은 그가 낙향하여 지은 것으로 그때의 이름은 옥소정이었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는 귀양살이 도중 의문사했다고 전해지는데 고종의 죽음을 들은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꽤 경외심과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입신출세와 재산형성 과정에서 수많은 의혹과 지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옥소정 건립 과정에서 강제로 부역을 동원하는 등의 권력행사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그가 죽자 예천 권씨 문중에서 옥소정을 사들여 병암정이라 이름을 고쳤고 독립 운동가였던 권원하가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곁에는 별묘를 세워 선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암정 절벽 아래는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아주 자그마한 섬이 있다.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황진이’에서 이곳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섬에는 정자가 서있었고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황진이는 이곳에서 첫사랑인 도령과 처음 만나고, 첫 키스를 하고, 반지를 받았다. 다리와 정자는 철거된 상태다. 그때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오늘, 병암정 연못은 경악스럽고 허탈하다. 물과 섬은 가장자리가 작도되어 돌덩이들로 꽁꽁 매여졌다. 연못은 목욕탕 같고 섬은 밥그릇에 담긴 고봉밥 같다.


병암정으로 오른다. 담과 건물도 최근에 손질되었다. 담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갑갑함을 동시에 준다. 경관으로의 시선도 차단하고 있어 물리적인 폐쇄감도 느껴진다. 병암정 마루에 서니 들과 먼 마을이 시원하게 열린다. 담장아래에 디딤돌에 놓여 있다. 돌 위에 올라서면 담장너머 너른 들이 열리고 시선을 떨구면 둥근 연못이 보인다. 자연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장식미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연못은 병암정의 정원이자 미학적인 완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정원은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다. 상상력이 없다면, 존중이라도 해야 한다. 병암정이 이곳에 있는 이유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연의 에너지와 자유에 대한 존중 말이다. 건축물은 역사로 태어나지만 그 뒤에는 문화에 속한다. 오늘의 문화에….


☞찾아가는 길

55번 중앙 고속도로를 타고 예천 IC에서 내려 회룡포, 예천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예천읍에서 928번 도로로 용문면 금당실 전통마을 쪽으로 간다. 금당실 마을 가기 조금 전에 병암정이 있고, 금당실마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초간정이 있다.

 

 

 

출처 :  영남일보